니시지마 사다오에 대한 비판
일원적인 국제질서란 과연 존재했었는가?
조공책봉관계는 정치적 상하질서의 확인작업
중국중심으로 편찬된 사료의 한계
동아시아 역사에서의 한국의 배제
당에 대한 신라의 태도
당이 요구하는 일원적 체제에 우호적.
고구려가 반발한 것과는 다른 태도.
한반도
1. 서론
고문서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동아시아국제관계의 키워드는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의 두 단어이다. 삼국시대부터 19세기 말까지 지속됐던 이러한 관계는 과거의 모든 대외관계를 관통하며 큰 족적을 남겼다.
신라(新羅)가 삼국을 통일하고
관계는 표면상 이전의 대수관계와 유사했으나 그 내면은 판이했다. 수나라는 대내적 안정을 이룩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수 중심의 국제질서를 확립하려다가 멸망하였다. 이어 518년에 건국된 당은, 성립 초기 주변민족을 복속시켜 가면서, 한편으로 민심수습을 위해 고구려와는 전쟁보다 평화적
동아시아, 동아시아와 세계 외교의 역학 관계, 공식 비공식의 국제 무역과 경제적 상황, 문화 교류와 첨단 학술 교류 등 아주 다양하고 많은 양의 정보가 생생한 모습으로 알알이 박혀져 있다. 연행록은 북경까지의 사행 노정, 제반 사행 의식과 절차, 중국의 역사와 전통과 제도, 인적 교류와 문화 교류,
관계를 유교적 군신의리로 이념화·정당화 하여 자신이 몸소 실천함으로써, 국내정치관계에서 국왕에 대한 신하들의 의리와 충성을 요구하는 규범적 틀로 작용하였다. 조선은 국제체제에서의 정당성 또한 확보할 수 있었는데, 조공체제는 봉건적 질서에 따르는 국제체제였기 때문에, 조공국은 이를 통
책봉호가 6세기 중반 이래 새롭게 변모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삼국과 수·당이 수수했던 책봉호를 분석하여 수·당의 동방정책과 삼국의 대응책을 고찰하려고 한다.
1. 남북조 말기 책봉호(冊封號) 구성의 변화
4세기 이후 동아시아에는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가 붕괴되고
동아시아의 근대화
중화주의 질서 해체, 서구 중심적 근대 국제질서로 편입
→1990년대 중반 이후
동아시아는 중국의 지속적인 발전에 가장 중요한 지역이 됨
화이사상과 국제관계
* 화이사상(華夷思想)
- 공간적인 개념과 자질로 설명
- 화(華) 와 이(夷)의 구분
조공관계는 종
관계에 있음을 암시한다. 반대로 1126년에 고려와 금이 조공과 책봉을 교환하게 되었음은 기술하지 않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조선이 건국 이후 명을 외교적으로 섬기면서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했으며, 명이 조선에 대해 정치, 문화적으로 ‘대국’으로 군림했던 사실은 기술하지 않고 있다.
2) 전쟁에
조공했을 때는 일본 스스로가 자진해서 관작을 청원하고 중국 왕조의 질서 체제 속에 편입하여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지배권을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에반해 스이코천황 시대의 견수사 파견은 적어도 중국 왕조의 관호를 요구하거나, 혹은 나아가 책봉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일본은 오히려 스스로의
1.필자는 과학적인 역사와 비과학적인 역사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필자는 역사를 크게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구분하고 있다. ‘사실로서의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무수히 많은 객관적인 사실을 의미하고,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바탕으로 역사가가 재